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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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차이
사도행전 8장 1절 ~ 13절 - 2017. 8. 13. 주일 오전예배 설교 - 67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8.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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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여름 캠프에 참석하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46회 여름캠프가 지난 7월 26일부터 매주 김천과 강릉에서 은혜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3차 캠프기간에 이틀은 김천, 이틀은 강릉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캠프에서 형제자매님들과 교제하고 간증도 들으면서, 우리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릉캠프에 참석했을 때 한 자매님이 남편을 모시고 저를 찾아왔는데 그 남편은 간경화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분께 죄 사함을 받으셨냐고 여쭤보니 죄 사함에 대해 듣긴 다 들었는데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안 믿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안 믿어지십니까?”라고 여쭤보니 “그냥 안 믿어집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믿기 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분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힘이 선생님에게 가고, 예수님 안에 있는 능력과 지혜가 선생님에게 갑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병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날 저녁 그분이 마음을 바꾸시고 죄 사함을 확신하셨습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는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을 섬기지만 그들의 마음이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믿어져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는 마음이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허황된 것으로 여기고 세상 방법을 확실한 것처럼 여깁니다. 성경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 3: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이유는 사람들이 더 이상 말씀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매우 쉽고 재미있지만 아무 생각없이 막연하게 살다 보면 너무나 허황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정확히 알고 믿으면 말씀을 통해 소망과 기쁨을 얻습니다.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

오래 전 대구 성경세미나 기간에 대구의「매일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교회를 다녀본 경험이 없습니다. 한국의 다른 교회와 기쁜소식선교회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한 마디로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기 어려웠으나 간단하게 예수님의 일생을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나타낸 겁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죄를 씻었지만 죄가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선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거룩하다’라고 믿습니다.” 기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것이 사실입니까? 다른 교회 가면 정말 아직도 죄인이라고 합니까?” “물어보세요.” “그럼, 그들은 무엇을 믿는 겁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모두 사했는데 죄가 남았다고 믿는 게 말이 됩니까?” 이튿날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많은 교회 목사님들이 신문사로 찾아와 항의하는 바람에 아무 일도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깊이 사고하지 않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지만 깊이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을 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그냥 남아있다면 십자가에서 죽음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완벽하게 씻으셨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 목사님들이 성경과 다르게 자기 생각에는 죄가 남아 있으니까 자기 생각을 따라 죄가 있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5개국 전도여행

저는 얼마 전에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가 가면 그 나라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수백 명씩 모입니다. 가나에서는 2백여 명, 케냐에서는 
6백여 명이 넘는 기독교지도자들이 모였고, 우간다 미라클교회에서는 7천여 명 되는 기성교회 성도들이 모여 있어서 그분들께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 말씀을 통해 죄 사함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 설교가 전국에 TV로 중계방송 되었고 미라클교회에서 전한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너무나 감격해 서 ‘아멘! 아멘!’ 하며 감사해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로마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을 잘 알지만, 신기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24절 말씀은 거의 모릅니다. 사람들이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죄인이지’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24절에 예수님의 피로 죄가 씻어졌다는 말씀을 보지만 지금 자기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해 믿음을 갖진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면 분명히 우리 죄가 씻어진 것인데 사람들은 죄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여야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찾아보았는데 신기하게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할 때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부딪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을 건져내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내가 무엇이 관대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리이까”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시겠다는 말씀인데 모세는 자기가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사람들은 자기 부족함에 빠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과 전혀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암에서 나은 한 자매님

지난 부활절 예배에는 미국에서 온 김윤옥 자매님이 암에서 나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 여동생이 저에게 전화해서 “목사님, 미국에 사는 언니가 암에 걸려 위중합니다. 가족회의를 하고 돈을 모았는데 언니 암 치료하는데 집안일도 도와 주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미국에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 김윤옥 자매와 통화를 하면서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자매님이 믿음을 갖고 암에서 낫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암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상담을 하다 보니, 만일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제가 병에 걸렸습니다. 제가 낫고 싶은데 하나님이 병을 고쳐 주세요”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매이면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종 암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좋은데 내가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겠나? 하나님이 나를 저주해서 암에 걸리게 한 것 같아’라는 생각을 통해 죽음과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죄를 완벽하게 씻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의’를 보고 ‘나는 의롭다. 깨끗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탁소에 맡기면 되듯이

예전에는 집에서 빨래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드라이 크리닝 해야 되는 옷감이 많아져서 세탁소에 맡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제가 옷을 깨끗하게 입어 깨끗한 게 아니라, 옷에 기름때가 묻었어도 세탁소에 맡기면 찾아올 땐 깨끗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탁소는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빨아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옷이 더러워 세탁소에 맡겼는데 깨끗하지 않다면 세탁소 책임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죄를 씻는 세탁소를 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흰 눈보다 깨끗이 죄를 씻지 않았다면 부실하게 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죄가 남아 있다면 아주 나쁜 세탁소보다 더 나쁜 분이라는 말입니다. 세탁소에 옷을 맡겨 놓았다가 찾아왔는데 옷에 기름때가 묻어있고 끈적임이 그대로 있어 더럽다면 세탁소에 항의할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못 사했다면 ‘예수님 죄를 사한다고 큰소리 쳐놓고 죄를 못 씻었습니까?’라고 따져야합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완벽하게 씻어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과 핍박

오늘 아침 사도행전 8장을 읽으면서 제 마음이 뜨겁고 감동스러웠습니다. 7장 마지막 부분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서 순교를 당합니다. 8장에는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고 사울이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4절에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고 사람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뉠 것입니다. 한 사람은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죽을 때 죽더라도 복음 전하다 죽자’라는 각오를 가진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은 무서워 도망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스데반이 죽었고 사람들이 옥에 갇힌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망적인 소리를 따라

여러분,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초식동물은 풀만 보이니까 아무리 고깃감이 많아도 먹을것이 없다고 하고, 반대로 육식 동물은 먹잇감이 많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똑같은 형편이라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옥에 갇히고 핍박받을 것 같은 절망적인 것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믿음을 갖게됩니다. 
빌립이란 전도자의 마음속에는 ‘그래 여기서 복음을 전해야 겠다. 핍박이 심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도우실 거야’ 하며 결국 그는 사단이 들려주는 절망적인 소리와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적인 소리 중에서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빌립은 핍박이 심했지만 예수님이 도우실 걸 믿고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해서 온 성이 기쁨으로 가득차는 충만한 은혜를 얻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요한복음 5장을 보면, 38년 된 병자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나는 다리가 다 말랐는데 난 다리병신인데 일어나면 넘어지는데 나에게 걸어가라고? 말도 안돼!’ 하며 그 자신이 듣기에 말도 안되는 소리였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생각에 자리를 들고 걸어 갈 수 있겠습니까? 못 걸어간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 생각이 싸움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을까? 내 생각이 맞을까?’ 어느 편으로 결정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분은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이야. 문둥이도 고치셨어. 그렇다면 내가 생각할 때는 아니지만 저분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라면 걸어 갈 수 있겠구나. ’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일어나 걸어갑니다. 
사단이 너무나 교묘해서 우리는 속은 줄도 모르고 속습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일을 할 때는 우리가 볼 때 안될만한 것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된다’라는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은 ‘그래 넌 안되지만 내가 널 도우면 돼. 넌 지금까지 일어나려고 발버둥쳐도 안됐지만 내가 일어나라고 했을 때, 내 말 믿고 일어나면 걸을 수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따르는 자

오늘 읽은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도 성령이 그에게 “또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라고 한 말씀을 따라 갔을 때 그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길은 우리 생각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형편을 보면 안될 것 같고 어려울 것 같고 망할 것 같지만 예수님이 그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지는데 자기를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따라 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복음전하는 그 길을 달려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속에 나타납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너 걸어가게 할 게. 걸어 가봐. 내가 너로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게 걸어가봐. 내가 너로 하여금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낳게 할께. 내가 일 할 테니 나를 믿어 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버지의 지혜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해 보니 저희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제 동생이 어려서 부터 잔병치레를 자주했는데 그때 중이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을 병원에 데리고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갔습니다. 아버지가 밤새 안주무시고 생각하다가 의사 선생님 댁에 가서 변소 인분을 다 퍼내 주고 그 집 지붕에 이엉도 새로 이어주고 그 집에 의사 선생님이 못하는 것을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집에 와 보니 변소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지붕에 이엉도 새로 되어 있어 아내에게 누가 이렇게 해놓았냐고 물었습니다. 아내가 “박씨가 해 놓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인분 못 치우고 지붕 수리도 못하는데 해주니까 무척 고마워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으셔서 성함 석자 겨우 쓸 줄 아시는 분인데 그 일로 의사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 마음에 자식으로 인한 아픔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들 데려와요. 치료해 줄게요” 그래서 동생이 치료받고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아버지가 제 동생이 자주 아파서 아들은 살려야겠는데 병원에 갈 돈은 없어 몇 날을 고민하다 이런 지혜를 얻으신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
 
마음이 여유가 있고 느긋한 사람은 깊이 사고하지 않고 ‘아이 힘들어. 나는 믿음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믿음은 통해 일을 하십니다. 우리에게 불행이 생겼을 때나 암에 걸렸을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평안할 수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렵고 불안합니다. 저도 삶속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지만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무슨 문제든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제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저 자신을 전부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뭘 해봐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사고를 깊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강남교회 성도 여러분, ‘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이 나에게는 역사 하지 않아’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말씀을 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과 문제가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그런 은혜를 입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2017. 8. 13.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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