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와 노력의 길을 가는 자 vs 믿음의 길을 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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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와 노력의 길을 가는 자 vs 믿음의 길을 가는 자
요한복음 5장 1절 ~ 15절 - 2017. 6. 4. 주일 오전예배 설교 - 66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6.0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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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상담을 하다 보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에 한 형제님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저를 찾아와서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 일을 어렵게만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움도 달리 보면 우리에게 유익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대로 그 어려움에 푹 빠지기 때문에 실제 눈앞의 어려움보다 마음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질 못하여 고통스러워합니다. 
저와 상담했던 형제님도 처음엔 너무나 고통스러우니까 술을 한 잔 하기 시작했는데 술에 취하면 모든 것을 잊고 평안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서 물론 술집에서 술을 마시진 않고 집에서 마시긴 했지만 술을 마시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도 알면서도 술을 끊을 수 없으니까 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예전에는 사업이 어려우니까 술을 마시고 어려움을 잊으려 했는데, 지금은 사업이 잘되는데도 마시던 술을 끊을 수 없어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믿을 것인가

신앙이란 우리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우리 귀로 들을 수 없는 예수님을 어떻게 잘 믿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막연히 교회 가서 예배드리거나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설교 듣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마음에 있는 죄를 씻음 받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찾아 그 마음과 만나야 합니다.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예배드리고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고, 헌금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1962년 제가 열아홉 살 되던 어느 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로 제가 구원받고 달라진 점은 ‘이 일은 어렵다’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항상 주님이 나타나 제 마음을 이끄시면서 평안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겁니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신앙은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일하시면 너무나 행복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믿음 없는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술 마시던 형제님도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니까 술을 마시면 안돼! 술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해도 집에 들어가면 냉장고에 있는 술병으로 손이 가고,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술을 마신다? 아니야, 술 끊어야 돼! 끊어야 돼!’ 하며 하루는 술을 끊을 수 있었지만 잠잘 무렵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술을 꺼내 마시게 되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가 잘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 형제님은 구원받았지만, 삶 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법을 모르니까 항상 자신이 노력해서 술을 끊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술을 끊게 해주시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술을 끊으려 하면 정말 어렵고 힘들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술을 끊게 하시면 정말 쉽고 행복해집니다. 
제가 7살 때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받은 후 아버지가 구원받도록 참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추석이나 아버지 생신 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뵐 때마다 아버지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래, 내가 내년 봄에 믿으마.” “왜 내년 봄까지 가야 합니까?” “내년 봄에 친구 회갑이라 내가 같이 술 한 잔 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으면서 술 마시면 되냐? 그러니 친구 회갑 끝나면 그때 술도 끊고 부지런히 예수님 믿을게.” 그래서 기다리다 다음 해 봄에 예수님 믿으라고 하면 아버지는 가을에 친구가 며느리 보는데, 그 일 후에 믿을 거라고 미루시다가 어느새 10년을 넘겼습니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은

우리 선교회에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있습니다. 요즘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스케줄은 ‘스바보드나’ 음악회와 합창대회, 개인연주회 등으로 아주 빡빡합니다. 그래서 밤늦도록 연습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연습을 하는데 발성법에서부터 음악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공부합니다. 교수진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에 계신 분들입니다. 합창단이 2001년에 창단되고 단원들은 러시아로 가서 음악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 국립음악원과 아주 가까워져서 지휘자까지 오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 총장님을 만나서 “이곳 국립음악원보다 우리 그라시아스 음악학교가 더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총장님이 깜짝 놀라며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지만 음악의 기본은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 그라시아스 음악학교는 학생들에게 마음의 세계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마음의 세계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사고하는 힘’입니다. 신앙에서도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생각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신앙생활은 천지 차이입니다. 

38년 된 병자 이야기

오늘 읽은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를 보면, 38년 된 병자가 연못에 와서 물이 동할 때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그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자가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얘기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걸 알지만 다리가 다 말라서 움직일 수 없으니까 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라는 말은 스스로 못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38년 된 병자의 형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그에게 능히 일어나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선교학교를 시작해라

마찬가지로 제가 대구 파동에서 사역을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선교학교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 저는 선교학교를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한동안 하나님이 조용하시기에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일 년 후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 선교학교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또 한 번 느껴졌습니다. 
하루는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선교학교를 시작해야겠다’라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성도들도 많지 않았고 참 작고 초라했으며 심지어 가족들은 양식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어려운 시기라 선교학교를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장모님의 오빠이신 임영빈 박사님을 찾아가서 선교학교를 시작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당시 그분은 연로하여 대한성서공회를 은퇴하셨지만, 예전에 세계성서공회 실행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한 한국 기독교사의 중심 인물이셨습니다.
그분은 제게 “복음적인 선교학교 시작은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다. 자네, 이 일을 꼭 해야 한다. 나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이제는 어렵다. 내가 마음을 다해 도와줄 테니 자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시작하라. 단 겸손한 마음으로 해라”라며 많은 기독교 서적도 주시고 선교학교 시작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더욱 깊이 깨우쳐 주셨습니다.

운영상 어려움이 많았지만 

제가 막상 선교학교를 운영하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는 죽을힘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어떤 학부모님이 찾아와서 항의하기도 하고, 학생들은 이러쿵저러쿵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보았던 만화영화 ‘머털 도사’가 생각났습니다. 누덕 도사가 머털이에게 도술을 가르치는데 머리털 세우는 것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머털이에게 툭 하면 “등 두드려라, 나무 해와라, 밥해라” 하며 온갖 잡일을 시켰습니다. 머털이는 그것 때문에 늘 불평했습니다. 누덕 도사는 그런 머털이에게 ‘돈도 한 푼 안 낸 주제에. 그게 얼마나 위대한 기술인데’ 하며 유유자적했습니다. 먼 훗날 머털이는 머리털을 세우면, 무엇이든지 변신할 수 있는 변신술을 터득하게 되면서 누덕 도사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려면 부담스럽지만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갈 때 정말 영광스럽고 복된 것입니다. 제가 선교 학생 5명을 앉혀 놓고 매일 매일 성경을 가르치는 동안 학생들이 말씀을 듣고 점차 믿음을 얻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로고스(logos)’이므로 그 말씀에는 그것을 이룰만한 능력이 같이 따라간다는 겁니다. 즉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이 같이 따라가서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여러분, 주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 병자에게 “네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면 걸어갈 수 있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가 ‘내가 어떻게 걸어가? 다리가 다 말랐는데. 나는 못 걸어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주님과 다른 마음입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가 마음을 바꾸어서 ‘지금까지 나는 내가 잘난 줄 알고 내 생각을 믿고 살아왔지만 잘된 게 뭐가 있나? 저분의 말씀을 한번 받아보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까 자리를 들고 걸어가 보자’ 하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졌을 때 예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 인생을 돌이켜본다면 우리가 더럽고 추하며 악하고 거짓되어서 부끄럽기만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옳다고 주장했던 것과 우리가 똑똑하다고 여기고 했던 일의 결과는 모두 죄악과 더러움이며 거짓이었습니다. 우리 삶이 정말 그렇게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받아보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나 걸어보자’라는 마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트럭과 부딪힌 그 순간

한번은 교회의 어떤 형제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바쁘게 가는데 반대편에서 8톤 트럭 운전기사가 술에 취한 채 운전을 하여 중앙선을 넘어 달려와서 그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부웅 떠오르는 그 짧은 순간, ‘머리가 먼저 떨어질 테니 머리를 다쳐 죽겠구나.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마음껏 일하지도 못하고 죽는 게 너무나 부끄럽다’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쿵!’ 하고 떨어졌는데, 마침 전자제품 대리점 앞에 있던 냉장고 박스 위로 떨어져 박스가 넘어지면서 땅바닥으로 부딪혔습니다. 가만히 누워 ‘내가 어디 아픈가?’ 생각해 보니까 아픈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눈을 뜨고 일어나려니까 창피해서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는데, 운전기사가 놀라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어서 이틀 후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은 하나님이 하신 걸까요? 우연히 이루어진 걸까요?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살아서 역사합니다. 

인간은 사단에 질 수밖에 없어

여러분, 술을 끊을 수 없어서 고민하던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님, 세상에 사람보다 연약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형제님의 힘으로 술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로마서 성경을 펴서 “형제님, 2장 4절을 읽어 보시겠습니까?”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형제님, 현재 술을 마시고 계시지요? 술을 끊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단은 형제님보다 훨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서 그가 막으면 인간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형제님에게 술을 끊도록 인도하시면 술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러면 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여기 성경에도 ‘알지 못하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여서 회개케 하시면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술이나 죄악에서 돌아서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형제님의 힘으로 술을 끊고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잡고 술, 담배, 도박, 마약, 게임 등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끄시면 누가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거룩하신 예수님이 우리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시니까 우리를 술 마시지 않도록 인도해 주실 걸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과 우리 인간이 노력하는 길로 가는 것은 서로 전혀 다릅니다. 
로마서 2장 4절의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해서 회개케 하여 바른 삶을 살게 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를 때 사람들은 자기가 술을 끊고 진실되고 착하게 살려니까 신앙이 어렵고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 형제님은 술을 끊고 싶었지만 끊을 수 없었다가 깜짝 놀라며, “제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저를 믿었네요. 예수님이 저를 위해 일하시는데 그것을 몰랐네요”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목사님, 이제 예수님이 제게 술 끊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신기하게 그날부터 술이 딱 끊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슬픔이나 괴로움을 취미로 갖습니까? 정말 그것들이 즐겁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제가 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 사단은 여러 가지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번 실망을 했습니다. ‘여기서 목회를 그만 둬야 하나?’ 하지만 저는 전도할 때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해 구원받는 사람이 생기면 정말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바라보면 불가능해 보였지만 잠시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어! 내가 걸어가고 있어!’ 말씀을 믿은 그리스도인은 항상 이런 기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살아서 일하시고

옛날에 짚신장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짚신을 삼아서 장이 서는 날 내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짚신은 아들 것보다 값을 더 받아도 점심이 되기도 전에 다 팔렸고, 그 후에야 사람들은 아들이 삼은 짚신을 사갔습니다. 아들이 짚신을 아무리 야무지게 만들어 팔아도 사람들은 아버지가 삼은 짚신을 먼저 사갔는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이라 해도 지금은 가르쳐 줄 수 없다”며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늙은 아버지가 곧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들이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짚신이 잘 팔리는 비결을 가르쳐 주셔야죠!” 아버지는 힘들게 숨을 넘기며, “털… 털… 털…”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기술을 남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는 모습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고통을 못 본 척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 속에 살아서 일을 하십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리고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씻었어. 내가 너를 의롭게 했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죄를 씻으려고 노력하며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2017. 6. 4.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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