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알린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그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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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알린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그는 누구?
특집 [3·1절 기획특집]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 기념전시회 3월 9일까지 서울시청 로비에서 열려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3.0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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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독립운동의 의미를 기리는 행사가 전국에서 열린다. 제 98주년 3·1절을 보내며 우리 민족의 3·1 독립만세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독립운동가였던 영국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박사를 조명해 본다. 

역사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긴 34번째 민족대표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있었다. 그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린 외국인이 바로 스코필드 박사(한국명:석호필)이다.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19세 때 캐나다로 유학, 수의과 대학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6년 한국이 일제의 억압 아래 있던 시기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한국인을 형제처럼 생각했고, 일제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탄압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독립운동도 지원하게 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을 앞두고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의 부탁을 받아 역사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그는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의 만세운동 장면을 찍었으며, 언론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외국인 중 유일하게 3·1만세운동 계획을 미리 통보받고 비밀리에 지원해 ‘민족대표 34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화성 제암리·수촌리 마을 학살 현장을 직접 방문해 증거를 모으고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일제의 불의에 맞서다 1920년 강제로 추방당해 캐나다로 돌아간 그는 195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해방된 한국에서 3·1만세운동 정신을 강조하며 독재 정부를 비판하고 한국의 부정부패와 맞서 싸웠다. 이러한 공로로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현재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의 삶과 정신 조명하는 전시회 개최

2.21~3.9까지 일제 만행과 한국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를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서울시청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98주년 3·1절을 맞아 스코필드 박사가 강조한 3·1운동의 정신인 자유, 봉사, 희생을 시민에게 알리고자 마련됐다. 
개막식(2.24)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에릭 월시 주한캐나다대사,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박원순 시장은 “스코필드 박사의 활동은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겪었는지 알게 해 주었다. 다가오는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스코필드 박사를 기념하는 전시관이 설립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스코필드 박사의 흉상을 비롯해 친필서한과 유품, 그가 촬영한 사진 등이 공개되었다. 특히 조선의 현실과 독립운동을 기록한 보고서 ‘꺼지지 않는 불꽃’에는 독립선언서, 독립탄원서, 3·1운동 행렬 광경, 감옥 경험담, 일본 경찰에 고문당한 한국인들을 치료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이 날 전시회를 관람한 이윤정(26, 용산) 씨는 “사실 34인 민족대표라는 스코필드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낯설었다.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 신분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것이 놀랍고 한편으로 존경스럽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국인을 사랑한 그의 숭고한 정신 기억해야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虎弼)’이다. 이름에서 ‘돌 석’은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호랑이 호’는 강자에게 호랑이 같이 무서운 사람임을 보여주고 ‘도울 필’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이름처럼 약자 편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몸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전 세계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했고, 이 기금은 가난한 학생들과 보육원 등에 보내졌다. 그리고 남은 일생을 한국의 어려운 학생들과 고아를 돌보는데 바쳤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독립 투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뒷받침 되었기에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 국민에게 보낸 이 메시지는 3·1운동의 정신과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김인나 기자 innakim@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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