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독립운동가 이승만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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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독립운동가 이승만 바로 알기
특집 2016 광복절 특집-②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6.08.12 18: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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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 덕분이다. 이에 제 71회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1875-1965) 박사의 업적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수감생활 중 대중계몽서 『독립정신』 집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는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의 대한민국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이승만 박사가 외친 말이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다. 혹자는 그를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칭하고, 한편에서는 독재자라 부른다.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공과 때문이겠지만, 그로 인해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마저 저평가 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 박사는 ‘독립협회’를 통해 개화운동을 벌이다가 역적으로 몰려 5년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다. 옥중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대중계몽서인『독립정신』을 집필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외교의 중요성과 자유와 주권의 가치 등 민주주의 기본정신을 대중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1904년 석방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근대식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한편, 1910년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게 되고 이승만 박사는 미국 내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외교 독립론 주장하며 독립 위한 외교 활동 전개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독립의 길이 외교에 있다고 판단해 외교 독립론을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미국 등 강대국과의 외교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타협적이고 온건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미국 내에서 대한민국 독립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을 형성했고, 그 결과 우리의 독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드디어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뤄지자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건국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73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 그는 ▲대한민국 헌법 선포 ▲의무교육제도 실시 ▲토지개혁 시행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은 또 한 번 혼란을 겪게 된다.  휴전 이후 그는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을 지켜주고 있는 굳건한 한미동맹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장본인 중 하나다.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대한민국을 걱정하시던 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 아닌 인간 이승만 박사는 어떤 분이였을까. 이를 알아보고자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를 찾아가 보았다. 이곳은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대통령에 당선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지금은 그의 양아들 이인수(85) 박사 내외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이인수 박사는 고령임에도 이승만 박사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시간도 잃어버린 채 많은 이야기를 토해냈다. “서른 살에 양자가 되어 미국 하와이 이승만 박사님의 집에 갔을 때 생각이 납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신 이후 쭉 그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집안 곳곳에 검소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종종 마당에서 선 채로 생각에 잠겨 계시곤 했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그때마다 대한민국의 안위를 걱정하시던 기억이 납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이승만 박사의 애국정신과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과 요즘 우리나라에 애국심과 민족의 혼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대해 아쉬워했다.  
집권 중에 있었던 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과오마저 미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그의 헌신과 노력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 71회 광복절을 맞아 이념이나 정치 성향을 떠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이승만 박사의 업적이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강민수 기자 wonderwork91@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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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6-08-16 09:32:30
중요한게 빠졌군요 자기 혼자 도망치고 라디오방송으로 온 국민을 낚고 한강다리 폭파시키고 전쟁후엔 사사오입으로 부정선거, 권력욕에 물든 노망난 독재자였지요 중립적인 시각으로 봐도 그는 독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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