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저주를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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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저주를 받았을까?
[사도행전 5장 1절 ~ 16절] 2016. 1. 31. 주일 오전예배 설교 - 598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6.02.0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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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도소에서 만난 재소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래 전에 제가 수원교도소 성경공부를 통해 만난 재소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성실하게 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그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아주 가까워졌는데, 어느 날 제가 그에게 “죄명이 뭐예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 신나게 이야기하던 그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푹 떨구더니 “살인에 살인미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뭐, 사람을 죽였어요? 믿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또 살인을 하려고 했다고요?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은데”라며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며칠 후 그는 울면서 자신이 살인하게 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는 아내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모른 채 지내다가 그로부터 2년이 흐른 후, 아내가 춤을 추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충격을 받고 아내를 위협도 해 보고 빌면서 애원도 해봤지만, 아내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계속 춤을 추러 다녔습니다. 다시 일 년가량 지난 뒤에 처형이 아내를 데리고 춤추러 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형을 찾아가서 “제발, 우리 집사람 데리고 춤추러 다니지 마세요”라고 애원했지만 “네가 뭔데? 내 동생 데려다 고생시키는 주제에!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 하면서 아주 모욕적인 말을 했습니다. 순간그는 확 돌아버렸는데,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고 처형은 죽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시 칼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가서 “나와. 다 죽여 버릴 거야!” 하며 마구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모범수였지만
 
그는 살인죄와 살인미수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재판을 받기 위해 담당 변호사와 접견하는데, “내 인생 끝났어요. 찾아오지 마세요.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살인을 해서 인생 끝났는데 뭘 뒤를 돌아 봐!’ 하며 변호사의 도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네 번째 찾아와서 화를 내며 “내가 당신 변호해서 돈 벌려고 하는 줄 알아요? 당신한테 변호비 받아도 술 한 잔 값도 안돼요! 젊은 사람의 장래가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하는데!”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가 다시 마음을 돌이켰고 변론을 통해 10년 징역 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모범수였지만 ‘어차피 버려진 인생, 빨리 나가서 그놈의 집사람들 죽이고 나도 죽어 버려야지’ 하며 또 제2의 범죄를 꾀했습니다. 
 
‘여기서 내 인생 끝이야’
 
저는 우리 삶에서 작은 일이지만 그가 가족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꽃 한 송이 들고 가서 축하해 주고, 식당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일은 큰 힘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들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만일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어서 결혼하려고 하는데 ‘우리 며느리 될 사람 한번 보자!’ 하며 같이 식사하면서 따뜻하게 이야기만 해 줘도 그것이 아들에게 얼마나 큰 소망이 되겠습니까? 당신이 다른 크고 위대한 일은 못할지라도 아들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면 그것이 바로 위대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 후 그는 마음을 바꾸고 성실하게 형을 마치고 출소하였습니다. 지금은 착한 아내를 만나 재혼해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살인을 하고 교도소를 가면 자기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해서 소망 없이 생을 마무리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큰 죄를 지은 후에 ‘여기서 내 인생은 끝이야’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무서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기를 낳을 때 순산이든 난산이든 모두 산고를 겪지만, 아기를 낳으면 그 기쁨 때문에 고통을 금방 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한 형편에 있을지라도 작은 일 하나에서 기쁨을 이끌어 내는 마음의 힘이 정말 필요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처럼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체 없이 하나님으로 계실 때는 배고픔이나 추위, 피곤함을 느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는 피곤함, 졸음, 배고픔을 느끼는 육체의 불편함을 갖게 되신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뿐인 우리 인간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죄 사함을 받으면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서우리 자신을 드리고 싶은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는 인간의 몸에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로 똑같이 영과 육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오늘 아침에 읽은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순절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설교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변하여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3천 명이 구원받고, 5천 명도 구원받는 등 성령이 충만한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근심과 두려움이 물러가고 기쁨이 가득차면서 많은 무리가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그들 가운데 밭과 집을 판 돈을 사도들 앞에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판 돈 중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베드로가 “땅 판 것이 이게 다냐?”라고 묻자 아나니아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하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떤 마음으로 땅을 팔았고, 또 왜 땅값 중 얼마를 감추었을까요? 그리고 이것은 왜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그 당시 교회 일을 하고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헌금을 드릴 때 아무도 모르게 주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하며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둔 것을 온 교회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바친다고 충동을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입었는데 하나님께 뭔가 드리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드려야 하나님 앞에 귀한 헌금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 분위기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니까 그들도 헌금을 드리려 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없으니까 결국 땅을 팔아서 그 값의 반쯤 더 되게 교회에 갖다 주고 나머지는 어려울 때 쓰자며 감추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땅 판 값이 이게 전부냐?”라고 물었을 때 “좀 남았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예, 이게 전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사람에게 인정받고 ‘내가 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린 헌금은 바람직한 헌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도 되고 팔지 않아도 되는데 왜 땅값 얼마를 숨기고 거짓말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 그 값을 교회에 드리고도 저주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빛이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방 안에 있는 전기 스위치를 끄면 방이 캄캄해지지만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어둠이 도망가고 밝아지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면   두려움이나 고통, 악한 생각, 절망 등이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말씀이 아닌 다른 세상적인 생각에 빠져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면 미움이나 음란한 생각에 이끌림을 받고 근심과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믿음이 없어, 안돼’ 하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죽고 우리 마음이 안 되는 쪽으로 흘러가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시므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십니다. 우리에게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말씀이 있으면 어려움이나 질병, 절망적인 일을 만났을 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예수님이 이런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어’ 하며 예수님의 능력이 크게 보여서 그런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에도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은 주님을 생각하기보다 자기 체면이나 자기 위치를 인정받으려는 쪽으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오늘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할 사실은 우리 생각으로 흘러가면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간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바라고 주님의 길로 가면 우리 인생 속에 어려움이나 절망할 일이 있어도 그 문제를 주님이 넉넉히 해결해 주시는 걸 봅니다. 다윗은 시글락이 불탔을 때 울 기력이 없도록 울다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따라가면 미치겠습니까?’ ‘따라가라. 정녕 미치고 도로 찾으리라.’ 그 말씀을 듣고 소망이 생긴 다윗은 그냥 앉아서 낙심하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쫓아가서 아내와 자식, 재물을 도로 찾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 마음이 어려움 속에 빠지면 ‘난 믿음이 없어. 기도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을 것 같아. 안 돼’ 하는 쪽으로 흘러가서 더 슬프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근심이 있어도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죄 사함을 받았지. 내게 주님이 계시지.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것은 문제가 안 되겠지’라는 쪽으로 우리 마음이 흐르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육을 위하는 마음을 남겨둔다면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육으로 흘러가도 두렵지 않은 마음을 주어서 하나님을 멸시하며 우리가 육을 따라 살아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것을 보면서 ‘두렵다. 나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되면 안되겠다. 헌금을 안할 땐 안하더라도 할 땐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지. 누가 봐주길 바라면서 해서는 안되겠다’ 하며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후 예루살렘 교회 안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병에서 낫는 사람이 일어나고, 믿는 무리의 수가 더해지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교회 안에 있으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육을 위하는 마음을 남겨둔다면, 믿음으로 힘 있게 달려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 한 것이 드러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 읽고, 교회를 섬기려는 영적인 일들을 못하게 방해하는 우리 속에 숨어있던 육신의 생각이 제거 되면 육에 매였던 우리 영혼이 해방을 얻습니다. 그때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이 나타나고 주님의 능력이 우리 삶을 놀랍게 바꾸십니다. 
 
태국 선교사 간증을 통해
 
지난 주에 태국에서 만난 김 선교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동안 태국에서 월드캠프를 여러 번 했는데 캠프를 마치고 나면 늘 아내가 며칠씩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캠프 하다가 집사람이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캠프가 끝나면 몇 만 불씩 빚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김 선교사님은 ‘2015년에는 내 방법을 한번 버려 보자.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월드캠프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작년 1월에 태국 월드캠프 장소로 처음엔 방콕대학의 1,200석 강당을 빌리기로 계약했는데, 갑자기 개막식 2주 전에 교직원 회의 결과 학생 수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며 캠프 장소 대여가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캠프 장소를 다시 구해야 했는데 다행히 방콕대학 옆에 있는 탐마삿대학교에서 월드캠프를 유치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월드캠프 1․2차 참가자 모집에서 3,200명이 신청하여 캠프에 참가했고, 탐마삿대학에는 5,000석 규모의 실내체육관이 있었는데, 부속건물이 많아서 학생들 숙소로 사용하면서 경비도 크게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처음에 계약했던 방콕대학 장소가 취소되었을 때 걱정했는데, 많은 학생들을 캠프에 참가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이 이 캠프와 함께하셨구나’ 하며 감사했고, 캠프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구원받는 역사를 보며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육신적인 자기 생각을 따라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생각을 못하니까 영적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을 따랐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라는 말씀처럼 그들은 성령을 속이고 육으로 흘러가서 저주를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을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우리 생각에서 벗어나면 모든 일에 하나님이 도우시고 은혜 베푸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서 살펴봅시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2~16)  
여러분, 이런 성령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을 막는 육신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해야 하는데 졸립네. 나중에 기도해라. 저분에게 전도하고 싶다. 그런데 전도해도 구원받지 않으면 창피하잖아. 다음에 전도하자’ 하며 이런 식으로 우리 마음을 계속 육신의 생각으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가 그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저주를 받지만, 우리 육신의 생각을 버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놀랍게 일을 하십니다.  

마음을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 속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과 육체가 서로 싸우면서 성령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을까 두렵습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서 육신의 소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 받게 되길 바랍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능력이 많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주님이 함께하시고, 예수님과 똑같이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병든 자도 낫게 할 수 있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날 줄로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동안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차고 그 마음에 이끌림 받으면 너무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 2016. 1. 31.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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