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아픔 간직한 지뢰꽃 마을, 철원 대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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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 간직한 지뢰꽃 마을, 철원 대마리
특집 호국보훈의 달 특집-③ 민간인이 지뢰밭 개간해 마을 이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역사의 현장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2.06.1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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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근 시인 |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 전경 | 백마고지 전승비 앞 백마상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이 정전협정으로 중단된 지 69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반도 곳곳에 남은 전쟁의 상흔은 아물지 않고 있다. 비무장지대(DMZ)와 잇닿아 있는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한 마을이다. 

1967년, 대북심리전 위한 전략촌으로 조성

대마리(大馬里). 이름도 낯선 이 마을은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백마고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중앙길을 따라 열을 맞춰 세워진 집. 그리고 알록달록한 지붕은 대마리의 정체성을 엿보게 한다. 1967년 조성된 대마리는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촌이다. 
우리 정부는 휴전 이후 서서히 체제가 안정되자, 휴전선 부근 농지를 확보하고 대북심리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접경지역에 전략촌을 만들었다. 대마리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Kibbutz)’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키부츠는 생활공동체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을 형성하여 구성원이 공동으로 농업, 경공업 등을 운영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언뜻 보면 다른 평범한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는 마을이지만, 사실 이곳에는 깊은 전쟁의 상흔이 숨겨져 있다. 기자는 대마리의 역사를 알려 줄 사람을 수소문하던 중 잊혀져 가는 대마리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정춘근(61)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철원이 고향인 그는 1999년 계간 실천문학에 <지뢰꽃>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일곱권의 시집을 펴냈다.  대표작으로는 <수류탄 고기잡이>, <황해>
<반국 노래자랑> 등이 있다. 그는 등단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글을 쓰고 있다.

대마리 문화역사관 내부를 안내해주고 있는 정춘근 시인  사진/ 홍용학 기자

제대로 된 장비 없어 사망·부상자 발생

지난 주말 대마리 내에 있는 역사문화관에서 만난 정춘근 시인은 ‘대마리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스토리를 가진 마을’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민간인이 지뢰지대를 개간하여 만든 마을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대마리에 196가구(447명)가 살고 있지만 과거 이곳은 지뢰밭이었다. 1976년 150여명의 민간인이 지뢰를 캐고 땅을 개간해 마을을 만들었다”며 대마리 개척의 역사를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대마리를 개척한 분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제대로 된 지뢰탐지 장비가 없어서 미국산 라디오를 개조하여 지뢰탐지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지뢰사고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지뢰사고로 개척민 150명 중 1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발목을 절단했다”며 대마리의 아픈 역사를 들려주었다. 그럼에도 지뢰사고를 당한 이들 중 한 명도 국가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유인 즉 당시 개척민들의 입주조건 중 지뢰사고를 당해도 국가에 배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 개척민 중 예비역 중령, 미군 소속 한국인 첩보부대였던 켈로부대 출신 등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이처럼 대마리 역사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랜기간 각종 사료를 조사했고, 대마리 개척민들을 직접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마리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대마리의 상흔

정춘근 시인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대마리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정부가 개척민들에게 6000평의 땅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믿고 목숨 걸고 땅을 개간한 것이다. 그런데 국유지라는 이유로, 적산지라는 이유로 사유지라는 이유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대부분 정리가 됐지만 일부 대지 중 아직 분쟁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취재진을 ‘통제부 골짜기’라는 장소로 안내했다. 이곳이 대마리 개척민들이 지뢰밭을 개척하기 전에 임시 막사를 짓고 생활하던 장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인데 지금은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통제부 골짜기라 불리던 곳은 이미 과거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는 철원에는 대마리 외에도 금강산 철길 등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숱한 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앞으로 이런 유산들이 제대로 보존되어 많은 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하고 싶다”고 향후 포부를 밝혔다. 
강민수 차장대우 mska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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