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선 박애리 명창(名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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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선 박애리 명창(名唱)의 삶
줌인 대장금 OST ‘오나라’ 부르고 우리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온 36년 국악인생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1.10.0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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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리 명창

그동안 진입 장벽이 높고 어렵거나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던 국악이 최근 다양한 음악 장르와의 접목을 통해 새롭게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에 일찍이 팝핀, R&B, 트로트 등 타 장르와 어우러진 국악을 소개하며 국악의 대중화에 선도적 역할을 해 온 박애리 명창을 만나보았다.

팝핀현준과의 결혼, 확장된 음악적 역량

지난해 7월 판소리를 현대 팝으로 재해석한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판소리 ‘수궁가’를 바탕으로 한 이 댄스음악은 단숨에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졌던 우리 전통음악, 국악(國樂)이 퓨전국악오디션 프로그램 ‘조선판스타(MBN)’, ‘풍류대장(JTBC)’ 등을 통해 다양한 음악장르와 크로스오버되어 세련되고 아름답게 소개되며 최근 국악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주 서울 대흥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애리(44) 명창은 “전통이 깊은 만큼 모든 음악 장르를 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 국악이다. 최근 TV프로를 통해 판이 넓어지면서 국악계 인재들도 널리 알려져 기쁘다”고 말했다. 박애리 명창은 9살 때 처음 판소리를 접한 후 눈물겹도록 좋아한 판소리를 모든 사람이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36년이 지나도 한결같다고 한다. 
그 열망은 팝핀현준과 만나 가시화되고 확장되었다. 2011년 대한민국의 대표 댄서 팝핀현준과 국악인 박애리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팝핀과 만난 후 판소리의 영역은 한계를 넘어 발전을 거듭했다. 박애리 명창은 “불후의 명곡(KBS)에 참가할 당시 20여회의 모든 스토리텔링 공연을 국악에 녹아있는 몸짓, 선율로 채워 국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 했다”고 회상했다. 

1. 팝핀과 국악의 유쾌한 콜라보레이션 공연 2. 팝핀현준과 박애리 3. 춘향국악대전 명창 부 대통령상을 받았다
4. 불후의 명곡(KBS)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 부부

춘향가·심청가 완창 등 국악 본연의 길에 진력

23세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박애리 명창은 2015년 퇴직하기까지 17년간 수많은 창극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초창기 역할은 흥부아들, 심청이 연꽃 열어주는 시녀 등이었다. 그땐 스스로가 너무 부족해서 지하 연습실이 비기라도 하면 배가 고파 손끝이 저릿저릿해질 때까지 연습했다. 국립극장 뒤 남산에 올라 소리연습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아울러 대타의 여신이라 불릴만큼 공연의 모든 역할을 다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했다”며 “입단 1년만에 주연을 맡게 된 계기도 여자주인공이 연습을 나오지 못한 딱 하루, 코러스였던 내가 주인공의 노래를 다 외우고 있어 대역을 했다. 한 달 뒤 그 작품에 더블캐스팅 되고 1년 후, 단독 주인공으로 해외순회공연을 나섰다”고 말했다. 
성우향 명창에게 춘향가를 사사하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가 된 박애리 명창은 국악과 대중음악을 접목해 판소리 대중화에 정성을 쏟으면서도 국악 본연의 길에 진력하기를 소홀하지 않았다. 2018년엔 6시간에 걸쳐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하고 지난해엔 심청가를 5시간 동안 열창한 그는 “다섯마당의 판소리 중 이제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완창무대를 남겨두고 있다”며 웃었다. 또한 박 명창은 2005년 남도민요경창대회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유명한 국악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춘향국악대전에 다시 도전해 2번째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세상에 쉬운 일도 없지만, 안되는 것도 없어요"

탄탄대로만 걸었을 것 같은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박애리 명창은 “대학 2학년 때 동아국악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차세대 명창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듬해 갑자기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한 달, 6개월, 
1년…거칠고 갈라지는 소리가 나 사람들을 피해 연습하며 다녔던 고뇌의 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한두 달 소리를 쉬라’는 박송희 명창의 말씀을 따르면서 목소리가 돌아오기 시작했다”며 “그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다. 발성법, 호흡법, 창
법… 예전에는 체화(體化)되어 뱉어내면 나왔던 소리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연구하고 연습하며 찾아갔고, 몸도 악기 다루듯 소중히 여겼다”고 밝혔다.
한편, 전남 목포에서 상경한 그는 전세 천만원 옥탑방에서 살며 대학시절엔 굶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창극단 인턴시절엔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고 30만원으로 생활했다. 그래도 판소리를 업으로 삼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박애리 명창은 “나는 수없이 많은 해변의 모래알 중 하나지만 언젠가 반짝이는 나를 알아볼 것이고, 준비되어 있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주저하는 시간만큼 꿈은 멀어진다. 세상에 안되는 게 어딨으며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나”라며 미소 지었다.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뉴 프론티어 박애리 명창. 그와의 만남은 아직까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송미아 기자 miaso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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