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를 통해 재조명한 오늘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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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를 통해 재조명한 오늘의 대한민국
기획 [특집] 영화『국제시장』 광부 스토리의 실제 주인공, 권이종 교수를 만나다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1.06.0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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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코로나19로 인해 2030세대는 힘겹기만 하다.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대국이 되기까지 산업화의 중심에서 고군분투했던 당시 대한민국 2030 젊은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파독광부였던 권이종 교수를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파독광부 등 외화송금, 경제발전의 핵심 역할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국제시장』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대사 중에서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은 군사·경제력 세계 10위권에 진입하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헤쳐왔다. 후손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선배들의 희생과 노력은 40~50년간 국내외 할 것 없이 처절하게 이어졌다. 파독근로자, 월남파병, 중동근로자, 구로공장의 여공들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 흘린 피와 땀으로 한국은 마침내 세계에서 유례없는 초고속 성장을 이뤄냈다. 특히 파독광부와 간호사 약 2만명을 담보로 제공받은 1억 5000만마르크(약 450억원)의 독일차관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의 종잣돈이 되어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964년 파독광부였다가 1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권이종(81) 한국교원대 명예 교수는 “막노동장에서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파독광부모집’ 기사를 보여주며 함께 독일에 가자고 했다. 파독광부가 되면 당시 공무원 월급(약 5000원)의 10배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때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연간 70달러인 반면,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보낸 외화는 연 1200달러에 달해 파독근로자들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비율이 약 15%를 차지했다. 

(상)당시 파독광부들의 모습 (하)2021 명목 GDP 전망 순위

지하 1000m, 36도의 열기 속에 8시간씩 채굴

1963년, 첫 광부 모집(500명)에 무려 4만 6천명이 몰렸다. 상당수가 대졸자인 가운데 1977년까지 파독광부로 나간 한국 젊은이는 7936명이었다. 20~35세의 남성들은 신체검사와 더불어 달리기, 모래가마니 어깨위로 들기 등의 체력검사, 영어와 국사시험을 통과한 후 머나먼 독일로 향했다. 
권이종 교수는 “탄광이 산속에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은 넓은 평야 한가운데 있었다. 그곳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00m이상 내려간 후 전철로 3~4㎞ 이동하면 막장이 나왔다. 속옷만 입고 헤드랜턴에 의지해 하루 8시간씩 일했다. 지열과 가스로 채탄장의 온도가 36도를 육박해 마스크도 쓸 수 없었다. 영화『국제시장』에 나온 대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같이 간 동료가 일주일 만에 죽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총 27명의 파독광부가 사망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4명이 자살했다.  
어두운 막장에서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틈틈이 공부를 했던 권 교수는 양어머니 권유로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외국인 최초로 사범대학(아헨교원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어려운 수업과정을 따라가지 못해 너무나 힘겨웠다.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수세식 화장실에서 울고 자고 쉬었다.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만 했는데 야간에 호텔에서 일할 때는 공부도 하고 팁도 받으며 외국인들이 남긴 음식을 싸와서 먹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도 다녀왔다”고 회상했다.

한국인 최초로 독일 교육학박사 학위 취득

1979년 2월, 마침내 권이종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독일 순수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6년만에 금의환향한 권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교육법’과 ‘청소년 기본법’이 제정되고 평생교육과 청소년 교육을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광부생활 3년간 매일 일기를 썼던 그는 파독근로자들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 및 박물관 건립에도 앞장섰다. 현재는 ADRF(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동들이 교육을 통해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편 권이종 교수는 지난 4월, 81년 인생을 되짚어보는 책『파독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를 출간 (사진)했다. 독일에서의 16년, 대학 강단에서 27년, 은퇴 후 봉사단체에서 1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역경을 이겨낸 스토리를 정리한 것이다. 그는 “고통인줄 알았던 코로나가 50주년 결혼기념일에 맞춰 책을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며 웃었다. 
인터뷰 말미에 권 교수는 “내 나이 24세, 가장 푸르를 때 인생 막판에 간다는 막장에서 지냈다. 매시간, 매초 생과 사를 넘나들며 두려움 가운데 살았다. 요즘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대, 그 환경보다는 낫지 않겠나.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주도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송미아 기자 miaso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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