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善과 의(義)를 버리고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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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善과 의(義)를 버리고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야 
[창세기 38장 1절 ~ 18절] 2021. 5. 1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1.05.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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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온라인 성경세미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은혜로 온라인 성경세미나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번 성경세미나에서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세계와 하나님이 가진 마음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대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지만, 우리의 사고(思考)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다른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믿는 신앙생활로 이끄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잘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을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거나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해서 또는 자신의 노력과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

창세기 27장을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받는 과정이 참 놀랍습니다. 원래는 장자인 에서가 복을 받아야 하는데 야곱이 이삭에게 거짓말을 해서 축복을 가로채고, 에서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충성스럽게 사냥하여 요리한 것을 가져오지만 동생에게 복을 빼앗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충성스러운 에서가 복을 받아야 하는데, 왜 거짓말한 야곱이 복을 받지?’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에서가 한 수고가 크게 평가되고, 야곱이 한 거짓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야곱이 거짓말을 해서 밧단아람에서 14년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설교하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했을까요?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에 매일 나가고, 죄인이라고 매일 회개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거짓말하고 악을 행했다고 해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가나?

우리는 오랫동안 사단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하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의를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 죄를 씻고 천국에 갈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형벌을 당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24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가 잘한 것, 못한 것, 그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죄를 사함 받는 유일한 길

어떤 분은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하나님께 충성하고 전도하며 헌금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남을 위해 희생했다. 복음을 위해 살았다. 이런 것들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만약 다른 길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행위로 거룩하고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 죄를 씻는 능력도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을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착한 일 하고, 충성하고, 기도하고, 헌금해야 복을 받고, 죄 사함을 받는다는 우리 인간의 생각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목회자 양성시 어려운 점

예전에 제가 큰 예배당을 지으신 한 목사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목사님, 예배당을 짓고 흐뭇한 마음이 든 적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깜짝 놀라며 “예, 제가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예배당을 짓는다는 소식을 들은 외가 친인척들이 찾아오셔서 예배당을 보시고 ‘우린 자네가 이렇게 큰일을 하는 목사인지 몰랐네’라며 저를 대견해하셨는데 그때 흐뭇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1976년에 선교학교를 시작했는데 목회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가장 어려운 신앙의 몇몇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은 복음을 전해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 그런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성경을 계속 대하다 보면 자기 생각으로 바라본 세계와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옮겨지면 서서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구원받으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점점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영적인 사람은 ‘아,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가 잘한다는 생각에 머무르는 사람은 어느 날부터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되어 결국 말씀과 멀어지면서 타락하고 사역을 실패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받는 축복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은혜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주겠다고 말한 대로 만약 애를 써서 사냥을 하고 음식을 만들어 가져온 에서가 축복을 받았다면 모든 복의 근원이 충성과 열심, 순종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27장을 기록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는 관념을 깨뜨리고 야곱처럼 은혜로 우리에게 복 주시려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서처럼 자신이 한 것으로 복을 받으려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기준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마 1:1~3) 이곳에 아브라함부터 계보가 쭉 이어지는데 놀랍게도 ‘다말’이라는 여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죄송하지만 당시는 여자를 인구수에 넣지 않을 정도로 부계 중심의 사회여서 여자의 이름을 족보에 올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다말’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여자가 되었는지 오늘 읽은 창세기 3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장자인 ‘엘’과 ‘오난’, ‘셀라’ 이렇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자녀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형제 중 한 명이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의 동생 오난이 다말을 취하여 형의 이름으로 후사를 잇게 해야 했습니다.

장자와 차자가 죽은 후

당시에는 장자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난의 입장에서는 형의 아들이 없다면 자신의 아들이 장자가 될 기회였습니다. 오난은 다말과 동침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땅에 설정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고 오난을 죽게 하였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이 죽고 나니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 것 같은 염려가 생겨 셀라를 다말에게 주기가 겁났습니다. 그래서 다말에게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셀라가 장성했지만 후사를 잇도록 다말에게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아무리 봐도 유다가 셀라를 자신에게 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후사를 이을 수 있는 길은 유다를 통한 길뿐이었습니다.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친정에 있던 다말이 어느 날 유다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과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말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옷을 입은 후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가에서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계획대로 유다가 그를 창녀인 줄 알고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주겠소.” “좋습니다. 그럼 제게 약조물로 당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세요.” 유다는 다말에게 약조물을 주고 동침했습니다. 이렇게 다말은 유다를 통해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다가 친구에게 딤나에 있는 창녀에게 염소새끼를 주고 약조물을 받아달라고 하였지만 친구는 그곳에서 창녀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석 달 후에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잉태하였다는 소문이 유다에게 들렸습니다. 유다는 화가나 당장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다말이 끌려가면서 외쳤습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까!”(창 38:25) 유다가 그것을 보니 자신의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다말은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입어 베레스와 세라,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과연 음란한 여자인가

우리의 생각으로 창세기 38장을 보면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더러운 여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눈과 성경이 보는 눈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다말을 예수님의 족보를 잇는 아주 중요한 여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절대 음란한 여자가 아닙니다. 다말이 음란한 여자였다면 아마 진작부터 다른 젊은 남자와 재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말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다의 후사를 이었습니다. 다말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귀한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불가능해 보였지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아마 사단은 다말에게 수도 없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너는 안 돼. 네 남편 엘이 죽었잖아. 만일 될 것 같았으면 엘을 통해 아이를 낳았겠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오난이 땅에 설정을 해? 오난도 너를 통해 후사를 잇기 싫어 죽임을 당했잖아. 봐봐, 셀라도 장성했지만 너에게 안 주잖아. 길이 없어. 넌 안 돼! 포기해! 그냥 세상 남자랑 살아!’ 하지만 다말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넌 안 돼. 전도 못해. 하나님 못 섬겨!’ 사역자들 중에서도 간혹 이런 사단의 음성에 속아 어려움을 당할 때 복음의 일에서 떠날 때가 있습니다. 사실 다말이 한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을 깊게 해야 했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편한 방법이 많았지만 다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촛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귀한 딸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첫 사역지 압곡동에서

우리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사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넌 안 돼. 네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 이런 생각들을 넣어줍니다. 저도 처음부터 복음을 잘 전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선교학교에서 훈련받을 때 복음을 전해도 구원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과 하루 종일 교제를 했는데 그 분이 구원을 못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주일 예배시간에 간증하러 나왔기에 저는 ‘어제 집에 가다가 말씀을 깨달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간증을 하면서 “어제 하루 종일 박옥수 형제하고 교제했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다가 다른 형제를 만나 교제했는데 5분 만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너무나 부족한 제 모습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렇게 첫 사역지로 압곡동에 갔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손을순 자매님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 아무도 구원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저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자매님이 구원받고 변하는 모습이 참 놀랍고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귀한 열매를 주셨다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귀한 복음의 첫 열매 

제가 압곡동에서 사역을 하다가 장팔리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자매님에게 동네사람들과 성경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매님이 깜짝 놀라며 “전도사님, 제가 어떻게 말씀을 전합니까. 저는 일본에서 온 지 얼마 안돼서 한국말도 잘 할 줄 모르는데…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래도 강권하니 자매님이 “네, 알겠습니다” 하며 돌아갔습니다. 
처음에는 자매님이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자매님이 잘하고 계시나 싶어 어느 날 저녁에 몰래 가서 들어봤는데 자매님이 너무 서툴러서 실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매님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구원받고 병든 사람에게 안수기도를 하면 병에서 낫고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그 자매님을 통해 구원받은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이 지금 강릉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박 목사님입니다. 이렇게 자매님이 계신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로 충만하고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우리의 선과 의를 버려야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는 게 어렵고 힘들어 보일지 모르지만 다말처럼 어려운 고비를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면 예수님이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내 생각에서는 불가능하고 안 될 것 같아도 담대함을 갖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 때 내가 잘한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 의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100% 예수님 십자가의 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이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과 의를 전부 버리십시오. 오직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거룩함, 예수님의 은혜만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참된 복을 받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 2021. 5. 1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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