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6번째 14좌 완등 산악인 김미곤 대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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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6번째 14좌 완등 산악인 김미곤 대장을 만나다
20년간 매년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오르며 14좌 완등의 꿈 이뤄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0.11.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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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브로드피크(8047m) 정상에 오른 김미곤 대장

세계적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43명의 산악인 중 한국인은 총 6명이다. 등반 강국 한국에서 가장 최근 14좌를 완등하고 지난 10월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김미곤 대장을 만나보았다.

지난달 체육훈장 최고 등급 ‘청룡장’ 받아

산악인들은 오늘도 히말라야가 가진 불확실성에 도전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극한 추위를 뚫고 깍아지른 빙벽을 오른다. 그 장엄한 행렬에 20년을 같이했던 김미곤(48, 한국도로공사 인재개발팀) 대장은 마침내 2018년 14좌 완등을 달성했다. 그리고 지난달 13일, 산악등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체육발전 유공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김미곤 대장은 2000년 초오유(8201m) 등정을 시작으로 2년전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에 성공하면서 故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김재수, 故 김창호에 이어 국내에서 6번째, 세계에서 40번째로 14좌 완등 위업을 달성한 최정상급 산악인이다. 과거 대학산악부에서 활동했던 김 대장은 “세계 최초로 14좌를 등정한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 씨의『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고 본격적으로 등반을 하게 되었다. 산을 좋아해 암벽과 빙벽을 재밌게 오르다 보니 히말라야에 오르게 됐고, 가다 보니 14좌에 올랐다. 그래도 아무나 할 수 있었다면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보통 히말라야 고산을 등반하려면 2~3개월이 걸린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김 대장은 운 좋게 2002년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에 들어가 회사의 지원을 받아 꾸준히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입산료도 만만치 않다. 개인은 천만원 이상, 팀은 1~3억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그는 영국 버그하우스 및 (주)블랙야크로부터 후원을 받아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을 21번이나 오를 수 있었다.

네팔에 도착한 블랙야크 구호물품(좌), 대지진에 파손된 집을 복구하는 원정대(우)

한국, 히말라야 등반은 1971년부터 시작 

1998년부터 히말라야를 등반한 김미곤 대장은 국내 산악계에서 가장 풍부한 등반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탁월하고 과감한 등반능력을 보여줬던 그도 2015년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르기 직전 발생한 네팔 대지진 때는 ‘철수냐, 전진이냐’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김 대장은 “다른 팀의 리더들조차 이미 10좌를 등정한 나의 결정에 주목하고 있었다. 서너 시간의 장고 끝에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가 지진 피해 구호활동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헬기와 차량이 접근하지 못하는 오지로 들어갔다. 먼저 원정대의 식량과 장비를 나눠주고 남은 자금까지 다 털어 식량을 구입했다. 열흘정도 지나자 블랙야크에서 엄청난 양의 텐트와 의류를 공급해줬다. 한국으로부터 ‘여진의 위험이 있으니 급히 귀환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한 달 가량 재난현장에 머물며 무너진 집들을 일으켜 세웠다. 보람도 있었지만 지진 피해로 현지인 가운데 정신질환자가 많이 발생해 안타까웠다”고 밝혔다. 
한편,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좌 중 첫 등정은 1950년 프랑스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히말라야 14좌 초등(初登)이 대부분 1950~1960년대에 이루어졌다. 우리나라는 1971년부터 등반이 시작되어 1977년 故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이후, 이탈리아(7명)에 이어 스페인(6명)과 함께 공동 2위의 등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100명 이상의 국내 산악인들이 등반 도중 숨지기도 했다.   

향후 후배 산악인 양성에 힘쓰고 싶어

2010년 김미곤 대장이 함께했던 마나슬루 원정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베테랑들로 꾸려진 원정대는 정상을 200~300m 앞두고 기상악화로 하산하는 도중 윤치원(40), 박행수(27) 대원을 잃었다. 김 대장은 “등반 중 동상으로 발가락을 잘라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이 갔는데 나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이듬해에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대에 합류해 7500m 지점에서 박행수 대원의 시신만 찾아 화장했다. 그 후 유족의 소원대로 영정사진을 정상에 묻기 위해 다시 마나슬루로 향했다. 산소도 없이 홀로 정상에 오르는 길은 육체의 고통을 넘어선 속죄의 길이었다”고 고백했다.
지난 20년간 히말라야를 오르며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김미곤 대장. 그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K2 동계 초등에 도전해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계획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마나슬루(1958년)를, 중국이 시샹팡마(1964년)를 초등했으나 한국은 초등 기록이 없다. 힘이 다하는 날까지 산을 오르겠노라며 호쾌하게 웃는 김미곤 대장은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6000~7000m 히말라야 고봉들을 찾아내 후배들과 오를 것이다. 처음 산을 오를 때 내 손을 잡고 이끌어 주었던 선배들의 사랑으로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고 농아인 산악회의 청각장애인에게도 히말라야를 경험시켜주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송미아 기자 miaso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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