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처럼 
상태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처럼 
[창세기 19장 23절 ~ 38절] 2020. 11. 1. 주일 오전 예배 설교 - 836 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0.11.06 16: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위로 하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보여지는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일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는 죄 사함을 받는데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피구원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노력으로 죄 사함을 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며 구원은 절대로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이야기하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열심히 신을 섬기고 충성하고 잘할 때 복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AD 69~155) 시대까지 이러한 참된 복음이 전해져 많은 복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복음에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 밖으로 나타나지는 외형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신앙이 믿음에서 행위 중심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아주 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새로운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이 얼마 못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영국에서 요한 웨슬레(1703~1791)가 죄 사함을 받으면서 감리교가 생기게 되고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역시도 믿음이 아닌 행위적인 면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변해가는 믿음의 기준

여러분,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에, 우리의 노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분명히 사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노력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기독교인이 신앙을 행위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저 장로님은 참 은혜가 넘쳐. 저 형제는 진짜 사랑이 많아. 저 형제는 참 겸손해. 저 사람은 성실해….” 이런 것들이 믿음의 기준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 그대로 믿음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착한 일 한 것, 헌금 많이 낸 것, 열심과 노력같이 눈에 보이는 행위를 가지고 나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같은 행위를 보시지 않습니다. 

알콜중독자인 남편

제가 심 전도사님에 대한 간증을 여러 번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진주에서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마치고 밤이 늦어 진주교회로 가려다가 합천교회 형제자매님들이 꼭 한 번 와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합천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 밤 12시쯤 도착해 성도분들과 모여서 말씀을 나누다 새벽 1시쯤 되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자매님이 돌아가지 않고 남은 채 울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도저히 남편과 못 살겠어요. 결혼한 지 22년이 됐는데 결혼 초 2년간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 후 20년 동안 하루에 8병에서 많게는 12병까지 매일 술만 마십니다.” 제가 “자매님, 울지 말고 내일 아침에 남편과 함께 교회로 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부부가 왔는데 형제는 벌써 소주를 마셨는지 술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저는 그 형제님에게 “술 끊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 형제님은 술을 끊으려고 수차례 노력했지만 결국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술을 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그것이 행위입니다. 저는 심 형제님에게 행위가 아닌 믿음을 넣어주고 싶었습니다. 

성경과 생각의 싸움

제가 심 형제님에게 성경 히브리서 10장 14절을 펴서 읽어주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리고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온전하십니까?” “아니요. 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가 어렵게 번 돈을 달라고 해서 매일 술 마시고 술주정 부리는데 어떻게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형제님이 온전하다고 되어 있고 형제님은 온전하지 않다고 하는데 성경이 맞습니까, 형제님 생각이 맞습니까?” “성경이 맞지요.” “그럼, 형제님은 온전하십니까?” “아니요.” 이렇게 심 형제님과 20분 정도 마음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싸움이 하나도 어렵지 않았던 것은 성경에 분명히 형제님이 온전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중에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셨는데 예수님이 주신 ‘거룩’이 부족하여 우리 힘으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면 예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을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얼마나 교만한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거룩하게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심 형제님과 그 믿음의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형제님을 온전하게 해 놓고 온전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 형제님은 온전하지요?” 결국 형제님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 목사님. 저는 온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아들이자 하루에 소주 10병씩 마시던 사람이 변해 술을 끊고 지금은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절대로 죄인을 보고 의롭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벌레가 잠자리가 되어

저는 어릴 때 잠자리를 잡으며 자연 속에서 놀았습니다. 잠자리는 원래 물속에 사는 물벌레였는데 어느 날 나무줄기나 풀줄기를 타고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햇빛을 받으면 물기가 마르면서 허물을 벗게되고 비로소 잠자리가 됩니다. 처음 펼친 날개는 아주 맑고 투명한데 혈관이 다 보일 정도입니다. 그 혈관을 타고 피가 흐르면 ‘푸드득 푸드득’ 날갯짓을 하면서 첫 비행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5m쯤 날아보고 그다음엔 조금 더 날아보고…, 이렇게 조금씩 날아보면서 ‘어 나도 날 수 있네’ 하며 잠자리는 더 멀리, 더 높이, 하루 종일 날 수 있게 됩니다. 잠자리는 물벌레였다가 그 허물을 벗고 나와서 날개를 펴 날아오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잠자리가 된 것을 믿고 날아야 하는데 여전히 물벌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물속으로 들어간다면 잠자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날개를 펴고 날갯짓을 하면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너는 이제 물벌레가 아니야. 잠자리야. 날아봐. 내가 날 수 있는 능력을 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지었지만 내가 십자가에서 네 죄를 깨끗게 했어. 이제 너는 거룩해. 의로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아니야. 지금 내 모습을 봐. 어떻게 의롭다고 해. 양심이 있지. 난 죄인이야. 의롭다고 말 못 해’라며 여전히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잠자리가 날개가 있는데도 ‘여기서 떨어질지 몰라. 미끄러질지 몰라. 조심해야지’ 하는 것은 자기가 날개가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을 믿지 않고 아직도 여전히 물벌레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잠자리가 된 것을 믿으면 날아야 합니다. 날개를 펴고 날갯짓을 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원주 통신훈련소 시절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저는 군 입대 후 원주 통신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어느 날 “박옥수 이병, 교수 본부로 와라”는 방송이 들렸습니다. 제가 교수 본부로 가서 “충성!” 하고 경례를 하자, 학교 교육 장교님이신 방 중위님이 제게 “박 이병, 자리에 앉으세요. 박 이병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하며 존댓말을 하셨습니다. “예! 교회 전도사였습니다.” “과연 그러셨군요.” 장교님이 어제 당직을 서면서 제가 산골짜기 양지에서 200여 명의 교육생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박 이병, 나는 군 입대 전에는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는데 군대 와서 신앙을 다 팔아먹었어요. 어제 박 이병을 보면서 밤새 잠을 못 잤습니다. 내가 도와줄 게 뭐 없나요?” “예, 교육 장교님. 지금 산에서 예배드리는데 좀 춥습니다. 교실 하나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교육 장교님이 한 병사를 불러 “박 이병에게 강의실 열쇠를 주고 예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수 있게 해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부대는 1군 사령부 예하의 교육부대 중 제일 큰 부대였는데 군목이 없어 제가 군목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훈련소를 졸업하기 한 달 전 함께 복음의 일을 하던 형제들과 “우리 중 한 명은 이곳에 남아서 예배를 인도해야 해” 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남으려면 성적이 5등 안에 들어야 하는데 그때 교육생 중에는 사회에서 모스부호를 몇 년 동안 하던 사람이 6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16주를 훈련받은 우리가 등수 안에 든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졸업 후에도 계속 남아서

졸업하는 날 아침, 방 중위님 사무실에 찾아가 “안녕하십니까. 오늘 졸업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잘 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방 중위님이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잠깐 들어와 봐요. 내가 처음에는 박 일병을 수경사나 52장통단, 부산 군수기지사령부로 보내려고 했는데, 박 일병이 여기 있으면 내 신앙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우리 부대에 남도록 배치했어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도와 일해 주세요.” 저는 부대에 남게 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예, 교육장교님. 감사합니다.” 너무나 기뻐서 벙커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제대할 때까지 통신훈련소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온라인 성경세미나를 통해

지난 5월 전반기 성경세미나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처음 몇몇 방송국에서 제 설교를 중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각국의 선교사님들이 방송국에 찾아가 성경세미나를 중계해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방송국 담당자들이 웃으면서 “우리는 기독교방송국이 아닙니다” 하며 거절했는데 한번 들어보고 결정해달라고 하자 그분들이 듣고 코로나 시대에 위로가 되는 메시지라며 방송을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둘 늘어 전 세계 276개 방송국에서 성경세미나가 중계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방송국도 아닌데 90분씩 11회나 되는 설교를 누가 무료로 중계해주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후반기 온라인 성경세미나가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성경세미나는 전 세계 600여 개의 방송국을 통해 중계되어 약 20억 명 정도의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에 말씀을 전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세미나 기간에 죄 사함 받은 간증들이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와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전한다고 저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죄 사함 받는 사람들이 수없이 일어난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믿음

최근 어떤 분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분이 말씀은 알겠는데 감동이 안 온다고 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기도를 할 때 불을 받았는데 마음이 뜨겁더라. 설교를 들으니 감동이 오고 눈물이 흐르더라’ 하며 인간의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감정이 빠져있습니다. 감정이 들어가면 그 감정에 따라 성경에 기록된 사실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도 감동을 주기 위해 꾸미지 않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하며 사실만 기록했습니다. 감동과 사실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에서 감동을 느끼려고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눈물이 안 나도, 몸이 뜨거워지지 않아도, 죄가 사해졌다면 사해진 겁니다. 내 감정을 믿겠습니까, 말씀을 믿겠습니까? 

롯이 선택한 땅은 저주의 땅

오늘 읽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에 왔는데 그는 자기 양 떼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롯이 목자들의 그런 행동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물 좋은 곳을 아브라함의 종들한테 다 뺏기네”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고 말합니다. 보통은 “삼촌이 선택하고 나면 제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할 텐데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보니 물이 많고 목초가 많아 그곳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람왕과 동맹군들이 쳐들어와 그동안 잘 기른 양과 소를 다 빼앗기고 포로까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알고 롯을 구해냈지만,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지 않고 욕망을 좇아 살았습니다. 결국, 유황불이 내려와 그의 모든 재산은 불태워졌고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오늘날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야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감사한 마음이 성령에 의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믿으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을 받으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 속에서 새롭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 사단도 일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면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을 주어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죄 사함을 받으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삶을 천 가지, 만 가지로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제 육신적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롯은 물질을 좇아 자기 방법으로 살면 잘 살 것 같았지만 결국 소돔, 고모라와 함께 망했습니다.
제가 복음의 일을 할 때 대적하는 사람도 있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지금까지 복음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매일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하면서, 마치 잠자리가 날갯짓을 시작하듯이 서툴지만 발을 내딛어 믿음의 삶을 한번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놀랍게 아름답고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2020. 11. 1. 주일 오전 예배 설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