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에 떠나는 부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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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에 떠나는 부산 여행
Goodnews BUSAN 817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0.06.1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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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아픔 담은 피란수도 부산

부산이라는 도시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몇 가지 키워드 중 한 가지는 ‘피란수도’이다. 불과 70년 전 이 시기, 전쟁을 피해 사람들은 남으로 내려왔고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인 부산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인구 47만명이던 부산은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우리나라의 임시수도로서 제 몸집보다 훨씬 많은 피란민을 보듬었다. 
피란민들의 오가는 발걸음이 모여 지금의 산허리를 빙빙 도는 산복도로와 한국의 마추픽추 감천문화마을, 한국의 산토리니로 불리는 영도 흰여울마을이 생겼다. 
많은 시민이 6월 말이 되면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전쟁의 흔적을 따라 부산을 여행한다. 호국보훈의 달, 의미 있는 부산 여행을 떠난다면 첫 번째 필수코스는 바로 ‘대한민국 임시수도기념거리’이다. 대통령 관저로 쓰였던 임시수도기념관과 정부청사였던 동아대 부민캠퍼스를 잇는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는 당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현재 이곳에는 실제 사용되던 전차, 교육시설로 사용되던 천막학교 등이 재현되어 있다.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는 경남도청, 6·25전쟁 발발 후에는 정부청사로 사용된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담긴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에서 대한민국 행정 중심지를 지나 이제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된 이곳은 지난 2000년 동아대가 매입해 2009년 지금의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한편, 부산에는 슬픈 역사가 담긴 곳이 존재하는데, 바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초량왜관(지금의 중구 일대)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는데, 아미동 산자락은 당시 일본인들을 위한 화장장과 공동묘지 터였다. 1945년 광복 후 일부 일본인들은 유골을 가지고 갔지만 대다수의 무덤은 그대로 남아 방치됐다. 고단한 삶의 연속이던 피란민들에게 무덤 터의 묘비는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비석들을 건축재료로 삼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형성한 마을이 바로 비석문화마을이다. 이곳을 찾은 이주미(40) 씨는 “누군가의 묘비가 마을 곳곳의 축대가 되고, 담벼락이 되어있는 걸 보니 당시 피란민들의 삶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부산/ 김지원 기자 busan@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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