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의 병자 가운데 누가 병 고침을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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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연못의 병자 가운데 누가 병 고침을 받았을까?
[요한복음 5장 1절 ~ 9절] 2020. 6. 7. 주일 오전 예배 설교 -  816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0.06.1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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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CTN 방송 녹화를 하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인간과 대화하시고, 마음을 나누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이 흐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정말 오랫동안 참된 신앙의 길을 몰랐습니다. 신앙을 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는 것인데 그 사실을 몰라서 내가 신앙을 이루려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주님이 저를 위해 일하시는 것이란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우리 삶을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사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로 사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즘 미국의 기독교 방송국 CTN(Christian Television Network)에 나갈 방송을 녹화하고 있는데, 제가 일하는 삶과 하나님이 제게 일하신 삶의 차이를 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

오늘 읽은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서든지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못가에는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 연못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갈 수 없는 사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많은 병자가 병에서 낫기 위해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를 기다렸다가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려고 연못을 주목하는 동안 그곳에 오신 예수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못 한쪽 편에 있었던 38년 된 병자는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하는 걸 봐도 자기 혼자 힘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줄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38년 된 병자뿐이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은혜란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간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되니까 그 천사를 하나님의 천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 천사는 하나님의 천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거나 병을 고쳐주시고 구원하실 때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올림픽 경기에서 1등 한 선수에게 금메달을 주지 꼴등 한 선수에게 금메달을 주진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은 능력 있는 자를 구원하시거나 도와주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오는 천사 이야기는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은혜는 인간의 어떤 수고나 노력의 대가로 받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강도 만난 자’ 이야기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0~35)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럼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처음에 강도 만난 자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여기 어딘가에 강도가 있겠구나’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역시 그랬습니다. 세 번째 온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해가 지면 주변에 있던 늑대 무리가 나타나 이 죽어가는 사람의 배를 찢고 창자를 꺼내 먹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

여기서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강도 만난 자를 도우려 했을 때 자기 생명을 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근처 어딘가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면 자신도 똑같이 강도들에게 죽임을 당할 텐데 자기 생명을 버릴지라도 이 강도 만난 자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를 위해서 생명을 버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실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더럽고 추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쉽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서 우리 죄를 사한 게 아니라 갖은 고난과 고초를 겪으시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행한 일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꺼내,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이 열 가지 일을 하나하나 할 때마다 강도 만난 자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쌍히 여긴 것도 강도 만난 자가 아니라 사마리아인이고, 가까이 다가온 것도, 그리고 상처에 기름을 부은 것도, 그다음 포도주를 부은 것도, 싸맨 것도, 자기 짐승에 태운 것도, 주막으로 데려간 것도, 그 다음 ‘돌보아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한 것도 사마리아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 잘해서 열심히 해서 복을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태양이나 산소, 비, 땅, 꽃도 값없이 주셨듯이 모든 것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강도 만난 자가 구원받기 위해 아무 한 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사함 받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도 이와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 10억 명의 시청자

지난 온라인 성경세미나를 전 세계 10억 명의 시청자들에게 중계방송했는데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코로나로 인해 부활절 연합예배를 다섯 개 언어로 인터넷을 통해 방송했습니다. 새벽 예배가 끝나고 200만 명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말씀을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200만 명이야.’ 그런데 스페인어를 통역했던 자매가 스페인어권에서 사천 명이 이번 부활절 예배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댓글을 남겼다고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댓글까지 달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천 명의 사람이 댓글을 남기기 위해선 적어도 십만 명가량 구원을 받았다는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어권에서만 이 정도인데 부활절 예배를 방송한 다섯 개 언어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변화를 입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절 연합예배를 마친 후 우리 선교회 진행부에서 전 세계에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에게 5월 10일부터 시작하는 온라인 성경세미나를 각국의 방송국을 찾아가 중계방송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방송국을 찾아가서 90분짜리 온라인 성경세미나 11회를 중계방송해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방송사마다 편성된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중계방송하려면 방송사 편성 프로그램을 변경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온라인 성경세미나 중계방송을 1억 3천만 명이 시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더니 마침내 10억 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중계방송을 통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라인 성경세미나 기간에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실내생활을 하고 스포츠 중계방송도 없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시청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천사는

여러분, 하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38년 된 병자를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본다면 ‘내가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서 내가 병을 고침 받아야지’ 하는 인간의 생각대로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오는 천사는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올 줄 알고,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지 못하도록 연못만 쳐다보게 했습니다. 만일 천사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연못가에 있던 많은 병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알고 있던 연못가의 병자들이 한쪽에 떨어져 있던 그가 일어나 걸어가는 걸 보았을 때 “어, 너 어떻게 걸어?”라고 묻는다면 “예수님이 고치셨어”라고 했을 것이고 이를 들은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 저도 고쳐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말했을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안식일인데 왜 걸어가냐?”라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걸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죄인이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가는 것 또한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노력하고 충성하면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충성하며 노력해서 구원받도록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이 노력해서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나, 8장에 나오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 9장의 눈먼 소경 이야기를 보아도 그들은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눈먼 소경에 관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이 길 가시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볼 수가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났는데, 누구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게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알맞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며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만한 능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저보다 똑똑하고 진실하며 착한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아닌 부족하고 못난 제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을 보면

이번에 피지원티비(Fiji ONE TV) 방송국과 인터뷰가 있었는데 앵커가 제게 요한1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 말씀처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이 죄를 사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자세히 성경을 살펴보면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4장에는 속죄 제사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레 4:27~28) 하며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과정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첫째, 죄를 지어야 하고 둘째,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또 죄를 지었지만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도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죄를 지은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속죄 제사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머리에 안수하고 그 염소를 잡은 후 제사장은 염소의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속죄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근본은

여러분, 요한1서 1장 9절의 죄를 자백한 사람은 죄를 지었고 자기가 죄지은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죄 사함을 값없이 주셨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죄를 자백했더라도 예수님의 피가 흘려지지 않았으면 절대로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 사함의 근본은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피에 있지, 우리의 자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백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인 걸 깨닫고 그 죄를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자백해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자백합니다. 저도 구원받기 전에는 수없이 죄를 자백했지만 그 당시 죄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번엔 요한1서 1장 7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는 우리가 죄를 깨달았기 때문에 죄가 사해졌다가 아니라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죄인인 것을 인정하면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죄를 자백해도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돼

요한1서 1장 9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고 죄인인 것을 깨달은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모든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자백을 해도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절대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걸 깨닫는 것, 죄를 자백하는 것은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언가 해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우리의 노력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사해진 것이지 우리의 어떤 행위나 노력으로 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 1서 1장 9절의 의미를 우리가 죄를 짓고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며 고백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아도 죄가 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걸 믿고 받아들인 것을 전제했을 때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는 정말 오랫동안 누워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 ‘나는 못 걷는데, 말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걸어? 왜 그렇게 말씀하시지?’ 하며 ‘나는 못 걸어’라는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생각이 악하고 틀린 것을 알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게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많은 병자들은 연못에 내려올 천사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38년 된 병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예수님이 없으면 걸을 수 없는 사람,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입니까?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듯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영광스러운 일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세워서 온 세계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위해 함께합시다. 하나님이 귀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 2020. 6. 7. 주일 오전 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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