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함의 승전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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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함의 승전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특집 호국보훈의 달 특집-② 대한해협해전에서 北 군함을 격침한 해군들의 희생과 그 의미를 재조명하다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0.06.1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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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분단과 함께 큰 상흔을 남겼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부산 앞바다에서 우리 해군의 첫 승리를 이끈 ‘대한해협해전’의 영웅 
최영섭(92) 예비역 해군 대령을 만나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저녁, 부산 앞바다의 괴선박

“6.25전쟁 70주년은 아주 의미 깊은 해다. 역사를 재조명하지 않으면 같은 역사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정확히 점검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올해 92세가 된 노병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그는 부산 앞바다에서 적함을 격침했던 ‘대한해협해전’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 백두산함(PC-701)이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했다. 6월 25일, 통제부사령관은 적군이 오늘 새벽 동해안으로 쳐들어왔다며 출동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작은 침투 정도로 생각하고 오후 3시 진해항을 출발했는데 8시 10분경 우현 45도 수평선에서 검은 연기가 발견됐다. 빠르게 근접해보니 배 이름도, 국기도 달려있지 않은 괴선박이어서 국적과 목적지를 묻는 발광신호를 보냈으나 아무 답이 없었다. 거리를 270m까지 좁혀가서 보니 갑판 위에는 무장 병력이 가득했고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 안에 있었다. 인민군이라는 확신을 갖고 다시 물러났다.” 
그는 “26일 00시가 지나자 공격 명령이 떨어졌고 치열한 해상 전투가 시작됐다. 백두산함이 실탄을 발사하자 적함은 함포와 기관포로 응사했고 죽기를 각오하고 450m까지 접근해 포탄을 쏘니 적함의 마스트가 꺾이면서 새벽 1시 10분경 적함은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지켜야 할 나라가 있어 감격했던 전우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잠시, 적 포탄이 백두산함 조타실 외관을 뚫고 자이로컴퍼스를 때려 조타사 김창학이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그 뒤 또 다른 포탄에 장전수 전병익이 가슴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외 몇몇 사병들도 부상을 입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전투에서 피를 가장 많이 흘렸던 김창학과 전병익은 응급수술을 받은 후 내게 가장 먼저 적함은 어찌 되었냐고 물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적의 동태를 확인하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용사들이었다. 격침했다고 답하자 눈빛이 환해져 가쁜 숨을 내쉬면서 ‘대한민국….’ 결국 ‘만세’라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라며 70년 전 전우들의 마지막 순간을 회상했다. 
그리고 책장 한 쪽에서 그날 전사한 두 전우의 사진을 꺼내 보이며 “3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항상 나눴던 이야기가 있다. ‘36년 만에 잃었던 나라를 찾았다. 대한민국은 소중한 우리의 보금자리이다. 우리의 군복을 입고 우리의 총을 들고 우리가 지켜야 할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전우들은 내게 부모와 형제 이상이었다. 당시 함께 했던 전우가 이제 8명만 남았다. 전우들의 사진을 담은 명부 수첩을 만들어서 지금도 자주 들여다보고 안부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전우애는 남달랐다. 그의 저서 『6.25바다의 전우들』이라는 책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각 전투에서 있었던 전우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 활약을 세세하게 기록해왔다. 또한 그는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아가 당시의 소식을 전하는 행적도 이어갔다. 

6.25전쟁의 분수령이 된 ‘대한해협해전’

‘대한해협해전’의 승전에 대해 미국 해군 연구소는 『한국전쟁과 미국 해군』에서 이 해상전투로 지켜진 부산이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되어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 항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이 해전은 6.25전쟁에서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백두산함(PC-701)은 우리 해군의 첫 군함이었다. 당시 국가 재정이 없어 해군 장병들이 월급의 5~10%를 갹출하고 장병 부인들이 삯바느질 등으로 852만원을 모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함 구입을 청원했고, 대통령이 4만 5000달러를 더해 미국에서 사들인 것이 인상적이다. 
이제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참전 노병에게서 듣는 역사 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했다. 6.25전쟁 이야기, 대한민국의 바다가 왜 잘 지켜져야 하는지, 국가가 없다면 개인의 행복도 없다는 이야기 등의 내용은 인터뷰라기보다 한편의 역사 강의와 같았다. 
그는 끝으로 “수많은 젊은이의 피와 목숨이 하늘과 땅과 바다에 스며있고 이들의 피로 대한민국이 유지되고 있다. 현 정부가 핵을 가진 북한을 친구라며 평화적 관계를 주장하는데 북한은 6.25전쟁 이후 70년 동안 3천여 건의 도발을 자행했다. 평화가 안보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안보가 평화를 담보하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 정확히 알고 반드시 이 나라를 잘 지켜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고정연 차장대우 jyko@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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