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상태바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사도행전 20장 7절 ~ 12절] 2020년 3월 1일 주일 영상예배 설교 - 8902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0.03.06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뉴욕교회에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 뉴욕교회에 와서 미리 CLF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사역자 신앙상담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우리 생각의 세계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으로 정확한 신앙의 길을 선택할 수 없어서 신앙생활이 참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내가 성경에 대해 너무 무지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40장에는 요셉이 시위대장 보디발의 옥에 갇혀있을 때 만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루는 두 관원장이 요셉에게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듣더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요셉처럼 이 꿈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결국 요셉이 해석한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안에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 복직했다는 것입니다. 

두 관원장의 꿈

이번에는 떡 굽는 관원장이 꿈을 요셉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꿈에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이제 요셉이 그 꿈에 대해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저는 똑같이 꿈에 대해 듣고도 전혀 이와 같은 생각을 못했는데 요셉은 어떻게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제가 깊이 생각하니까 조금씩 그 해석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꿈 해석을 살펴보니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하며 포도나무의 포도송이가 익어 그 포도를 따다가 바로의 잔에 즙을 짜서 갖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포도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흘리신 피를 의미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아무 선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이것은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흘리신 피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 값을 대신 벌 받았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생명을 얻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그에게 생명을 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떡 굽는 관원장은 왜 멸망을 당했습니까? 그는 꿈에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라고 하였고 그 흰떡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흰떡 세 광주리 위에 각종 구운 식물을 얹은 것은 흰떡 세 광주리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죄를 씻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데 ‘이것으로 부족해.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모든 죄를 씻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에 근거해야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떡 굽는 관원장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분명히 지불했는데도 그것이 모자라게 여겨지니까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뭐 좀 더 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어느 날 경찰관이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집에 없어서 나중에 경찰서에 전화해서 확인한 결과 3년 전에 교통법규를 위반한 범칙금 3만 원이 미납 처리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저는 경찰관에게 “제가 분명히 범칙금을 납입했습니다. 영수증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영수증을 찾으면 수납 직원을 확인해서 책임을 묻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아무리 집안을 뒤져도 영수증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3만 원을 납입해야 했습니다. 

모든 죄를 속(贖)했다는 영수증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납부한 영수증을 때때로 잃어버릴 수는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하늘나라 제단에 뿌려진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찢기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속했다는 영수증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 죄가 씻어졌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의인이라 할 수 있나

오래전 대구 성경세미나 기간에 대구매일신문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목사님, 기쁜소식선교회와 다른 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한 마디로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기 어려웠으나 간단하게 예수님의 일생을 이야기한 후 “기자님은 교회를 다니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는 아십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선교회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모든 죄를 사했다고 믿습니다. 다른 교회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기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사실입니까? 다른 교회 가면 정말 죄인이라고 합니까?”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목사님, 사람들은 죄를 사함 받은 후 또 죄를 짓죠?” “예, 죄를 짓죠.” “그런데 어떻게 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를 영원히 사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교회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까?” “모든 교회라고 말할 순 없지만 대부분 기독교인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실을 알지만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믿고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그리고 제가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가 많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며 분명히 우리가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23절은 우리가 죄를 지은 상태만 이야기했고 24절은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기자는 “예,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의로운 게 맞습니다” 하며 전혀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제 인터뷰 기사를 잘 써 주었습니다. 이튿날 대구 일반교회 목사님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듯 했고 신문사로 직접 찾아오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것은 기자 고유의 권한입니다. 저는 박옥수 목사님에게 질문하고 실제로 보고 느낀 대로 인터뷰 내용을 실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라고 오히려 따졌다고 합니다.

소설 『죄와 벌』을 읽으며

여러분, 대구 기자 일은 성경에 죄 사함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도 거기에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덧붙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예전에 저는 소설을 참 많이 읽었는데 그중에『죄와 벌』은 러시아 소설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입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법대에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휴학 중인 청년인데 어느 날 인색하기로 악명 높은 전당포 주인 노파를 죽입니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상치 못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처음부터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던 예심판사 포르피리에게 쫓기게 됩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감정이 전달되어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습니다.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죄와 벌』에 나오는 노파가 있었던 전당포와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을 찾아보려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설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지만 성경을 읽을 땐 너무 딱딱하게 느껴집니다. 소설책보다 성경이 더 귀한 책인데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를 살펴보니 성경에는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 부활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인데 그것을 노래로 표현했을 때 더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그라시아스합창단이 부르는 성가는 제게 더 황홀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을 잠재우고 아름다운 음악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신 듯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감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앙은 감정으로 되지 않아

왜냐하면 똑같은 사실도 감정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절까지 성경 어디를 읽어도 감정이 들어간 말씀을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하며 예수님의 죽음마저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습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을 일으켜서 신앙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냉정하고 감정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가 사해졌다는 진리의 말씀을 읽으면 ‘내 죄가 확실히 사해졌구나’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흰 눈 같이 희게 씻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단에게 속아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난 너무 더러운 악을 행했어. 난 짓지 말아야 할 죄를 지었어. 나는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죄인이야’ 하며 자기 생각과 감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가난했던 어린시절

여러분, 제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가난해서 굶을 때가 많았는데 배고프니까 남의 집 밭에 들어가서 고구마, 감자를 캐먹고 참외, 사과를 따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저는 교회를 다녔지만 ‘나는 분명히 지옥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성경을 읽으며 죄 사함 받은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제 마음속에 살아계셔서 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에 관한 말씀도 성경 전체에서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경우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 9:1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죄제사에 대해 알려주시려고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가기 전 40일 동안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을 그에게 자세히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야, 이건 제단이다. 물두멍이다. 떡상이다.…” 그런 뒤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은 하늘에 하나, 땅에 하나 단 두 개뿐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전을 구약시대에는 장막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성소를 뜯어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막 식으로 건축한 장막을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성전을 짓기 전까지 법궤를 들고 다니며 성막 안에서 양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영원계와 시간계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과 이 땅에 있는 성전의 차이점은 두 개의 성전 모양이 서로 같지만 영원계와 시간계에 각각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전은 시간계에 있기 때문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그 터를 메꾼 뒤 위에다 이슬람 신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처럼 시간계에 속한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리고 시간계에서 죄를 사하는 것은 순간 지은 죄만 사해지므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흘리신 피를 이 땅에 있는 제단에 뿌렸다면, 죄가 있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무리 수억 번 죽어도 우리 인류의 죄를 다 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 9:11)에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는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기 때문에 늙거나 변하지도 않고 죽음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9장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가 이 땅에 있는 제단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제단에 뿌려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 인간의 어떤 생각도 더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믿음 대로 살아난 유두고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없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에는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행 20:9~10) 하였습니다. 여기 유두고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도 예수님이 살리시면 살 수 있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말할 수 있던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인데 이미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죽은 유두고를 살리신다고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이런 일을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매일 죄를 짓기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죄인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 능력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역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전에는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하나님이 살리신다고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지금 숨도 쉬지 않고 죽어 있는 유두고를 놓고 사람들 앞에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유두고는 바울이 말한 대로 살아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이 우리 삶 속에 살아 역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생각 속에서 애매하게 있는데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바울이 유두고를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 속에 살아 일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 의가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지혜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능력이 되어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 2020년 3월 1일 주일 영상예배 설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